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두 여인네 마그넷 소개합니다.
씨시는 정말 수십 종류도 더 있을것 같은데 제눈에 예쁜걸로 하나씩 사오다보니 숫자가 이리 많아졌네요.
가장 늦게 구한건 핑크 엘리자벳인데 한동안 구하기 정말 어려웠는데 올해부터는 다시 제작이 되었는지 많이 판매하더라고요. 같은 인물인데 어쩜 이리 다 다른지 완전 다른 인물 같이도 보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옷이 약간 바뀌어서 새로 나오는것 같아요. 근데 프린팅 느낌이 들어서 더 늘리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자벳 여왕 (시시, 1837-1898)
바이에른 공작의 딸로 태어난 엘리자벳는 15세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던 그녀는 '시시'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궁정 생활과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간섭, 장녀의 요절,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등으로 인해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엘리자벳는 전통적인 궁정 생활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했으며, 시를 쓰고 여행을 즐기는 등 독립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헝가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엄격한 다이어트와 운동, 긴 머리카락 관리 등은 후대에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1898년 제네바에서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그녀의 비극적인 생애는 뮤지컬 '엘리자벳'을 통해 재조명되어 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왕실의 속박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고뇌했던 한 여인의 초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1717-1780)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자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통치자였습니다. 찰스 6세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1740년 23세의 나이에 즉위했으나 곧바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직면했습니다.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등 주변국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제국을 지켜냈습니다.
그녀는 프란츠 1세와의 결혼으로 16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그중에는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요제프 2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0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는데, 특히 교육 개혁은 주목할 만합니다.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빈 대학을 개혁했으며, 관료제와 군사제도를 현대화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켰고, 농노제 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했습니다. 또한 형법과 민법을 정비하고 고문을 폐지하는 등 법제도의 개혁도 이루어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교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가의 통제를 강화했으며,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계몽전제군주의 모범적인 예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녀의 개혁은 오스트리아를 근대국가로 발전시키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 통치자로서 보여준 리더십과 개혁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